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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불씨

post-truth(포스트 트루스)에 대하여 / 우주의 길 잃은 영혼들


세상의 진실은 외면받고 있다. post-truth(포스트 트루스) 탈진실이라는 말이 지금의 사회를 설명해준다.
이제 사람들은 과학을 의심하며 자신의 이득에 대해서만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그러하다. 미국의 지구 평면설을 진심으로 믿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왜 그런 터무니없어 보이는 거짓을 진실이라 우기는가?
그"진실"에 생각해보자.

 

과연 과학은 믿을 만한가?

이 물음은 20세기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자들의 주된 화두였을 것이다.
역사는 문명의 지배자에 의해 쓰여 지배자에 의해 해석돼왔으며, 타 문명의 역사적 시각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서구 문명이 어떤 근거로 타 문명이 "미개"하다고 이름 지으며 계몽시키고자 하는가. 과학적인 방법론이 과연 비과학적인 그들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가?

과학은 100퍼센트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가?
과학이 지정하는 진실에 대한 기준은 어디 있는가, 결국 주관적인 기준이 과학적인 진실이라 꾸며지는 것 아닌가?
결국 과학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과학이 옳고 비과학은 틀린 것이 될 것이다.

위의 과학이 애초에 과학만을 위한 프레임이라는 주장을 떠나서 다른 과학에 대한 불신의 이유를 보자.

과학이 믿을 만한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은 기본 관찰>이론>검증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다.
사과가 떨어진다>물체끼리 이끄는 힘이 있을 것이다> 물체들을 떨어트리는 실험을 통해 이론을 검증한다.
반복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 믿을 만한 "데이터"를 얻어내는 것이 과학이며 이는 진실에 다가가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과학 방범론는 동시에 타고난 결함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절대적"인 것을 밝혀낼 수도, 입증할 수도, 주장할 수도 없다.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백만 번 관찰했더라도 백만 한 번째에 하늘로 솟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100퍼센트라는 수치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어떤 과학자가 100%확실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저 과학자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아무튼 과학은 16-17세기를 기점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사로잡고 성장했다. 이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먼 우주와 미시 세계인 양자 세계에 대한 과학 이론을 검증해나가고 있을 만큼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의 발전은 동시에 사람들의 "믿음"을 강하게 잡아두지 못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쩔수 없이 직접 보지 않고는 믿기 어려워한다.
평범한 대중인 우리는 0.1퍼센트의 과학자가 정리한 그 과학 이론을 이해할 수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그 이론을 "믿는다".
일반 대중은 상대성이론, 양자역학과 같은 과학 이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믿는 것이고, 대학의 교수들을 믿는 것이고, 언론을 믿는 것이고, 대중의 믿음을 신뢰하고 믿는 것이다.

과연 나는 과학을 믿는가? 아니면 과학을 믿는 사회를 믿는가? 진심으로 깊이 고민해보아라. 과학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면 내가 지금까지 믿던 것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과학은 "절대적"것을 입증할 수 없다는 태생적인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과학은 진리에 대해서 탐구하지만, "의심"을 통해 끝없이 성장했다.
천동설은 지동설에 의해 깨졌으며, 만유인력 법칙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해 깨졌다.
과학은 절대적인 것을 찾고자 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절대적"인 "믿음"없이 살기 어렵다.

이것은 종교도 과학도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모두 포함한다. 사람은 무언가 믿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믿음을 어떤 "절대적"인 것에 아래 두고 싶어 한다.
당신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절대적으로 깨지지 않았으면 하는 무언가를 품고 있지 않은지.

현대 과학은 "절대적"인 것을 사람들에게 충분하게 제공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절대적 진리가 없는 것 같다고 의심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에 "믿음"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

이는 "신은 죽었다"라며 종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무너지는 것이라던 니체의 예언과 일치한다.
사람들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면서 종교의 종말을 통쾌하게 선언했다고만 생각하지만, 니체는 신이라는 절대자가 무너진 후 인류에게 다가올 고난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는 메시지도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제 절대 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대중은 과학을 "이해하고 믿을 만큼" 현명하지도, 과학이 믿을 만큼 "절대적"이지도 않다.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간다.
누군가는 사회운동의 길을 가고 누군가는 다시 종교로 돌아가고 혹은 사이비로 돌아간다. 그리고 누군가는 flat earth와 같은 유사과학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는 그들이 이론과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말하며 "믿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이제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그 속에서 평화를 느낀다.
그리고 누군가 그들의 믿음을 깨버리고 흔들려고 한다면, 자신의 인생이 무너지지 않게 강력하게 대응한다.
자신의 믿음은 과학에게 재단되지 않길 바라며 터무니없는 과학적 이론으로 반박하거나, 과학 자체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이 것이 바로 포스트 트루스(post-truth)가 이뤄지는 과정이다.

 

포스트 트루스(post-truth)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과학도 종교도 그 어떤 사회적 구조도 "절대적"인 안정감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21세기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짊어져야 할 짐이다.

우리는 니체 혹은 많은 실존철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실존의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타성에 젖은 기준을 벗어난 위버멘쉬(Übermensch)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철학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에서는 진실을 내가 어떤 "믿음"을 가졌을 때 그것이 나에게 이롭게 작용했었더라면 "진실"이라는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프래그머티즘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프래그 머시기가 포스트 트루스와 다를게 뭐냐"

중요한 것은 내가 믿음 갖고자 행동의 시작은 "실용적" 차원에 서지 "절대적"차원에서가 아닌 것을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용적 차원에서 시작한 믿음은 언제나 다른 곳으로 바뀔 수 있는 믿음이다.
어쩌면 이 믿음은 "실용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이다"라는 믿음일 수도 있다.

결국 실용적이지 못한 믿음은 폐기되고 더욱 실용적인 믿음을 가지며 나의 믿음은 변화할 것이다.
저 멀리 "절대적인 실용"을 향해 전진하듯이...

세상에는 그 어떤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상대주의. 그중 특히 배움 없는 상대주의는 세상을 염세적으로만 바라보게 하며, 개인을 절대 행복 만들 수 없다. 세상 오래 살지도 않고 세상의 많은 사유를 접해보지도 않고 결과적으로 세상의 진리는 상대적이라며 미리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배움 너머에는 그 어떤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가 그저 공허한 우주에서 부유하고 있는 무의미한 존재일지라도, 나의 존재를 우주 위 항해사라 스스로 칭하고, 어디론가 앞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상 과학 무지렁이, 철학 무지렁이의 글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